“50년 동안 사제로서 봉사할 수 있게 된 데에 대해서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불러주시고 이끌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또 저를 사제로 추천해주시고 키워주신 교회와 봉헌해주신 부모님께 감사하죠.”
전남 나주 노안성당 옆 ‘베타니아’라는 이름의 집이 있다. 작은 연못과 대나무 숲에 둘러싸인 한적한 공간에서 텃밭을 가꾸며 살고 있는 최창무 대주교(전 광주대교구장)는 어릴적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제가 생각했던 신부의 삶은 교우들과 함께하고, 자기 텃밭도 가꾸고, 일하고, 고해성사 주고, 미사 봉헌하는 그런 삶이었는데 순전히 저만의 생각이었죠. 그래도 그 소망은 헛되지 않았다고 봅니다. 퇴임한 후 바라는 대로 시골서 살고 있죠. 하느님은 너무 자비로우세요. 철없는 어린아이 때의 소망까지도 들어주시는 하느님. 그래서 너무 기쁘고 감탄할 뿐입니다.”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난 최창무 대주교는 1963년 6월 독일 프라이부르크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사제가 됐는데 주변에 가톨릭신자가 아무도 없었어요. 신품을 받아도 신부라고 호칭을 아무도 안해주니까 친구 이성우 신부(대구대교구 원로사목자)와 서로 마주보고 앉아서 신부님 신부님 하며 서로 인사를 나누고 그랬죠.”
이후 1969년 프라이부르크대학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해 가톨릭대학교 교수와 총장 등을 역임했다.
“환갑 될 무렵에 서울대교구 보좌주교가 됐어요. 새로운 부르심이죠. 제가 사회사목을 맡고 싶다고 건의를 했고 그게 받아들여졌어요.”
1994년 서울대교구 보좌주교로 임명된 후 최 대주교는 대내적인 사목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열린 교회를 지향하며 이전까지 특수사목이라 불리던 노동사목, 사회교정사목, 빈민사목, 정의평화위원회, 한마음한몸운동본부, 사회복지 등을 하나로 묶었다. 1995년에는 광복 50주년을 맞아 신설된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이 됐다.
“1983년도 미국 주교단의 교서 말미에 ‘우리가 정말 평화를 원한다면 평화 교육을 해야 한다’는 아름다운 말이 나와요. 그런데 우리는 평화 교육을 정말 안 시켜요. 갈등만 자꾸 야기하고, 비방하고, 욕하고…. 원수도 그런 원수가 없어요. 일각에서는 상대방이 잘못하는 것을 어떻게 하냐는 이야기가 나오죠. 그럼 영영 일치를 못 해요. 용서라는 것이 뭔가요. 화해와 용서라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특권이며 인간의 근본적인 요청이에요.”
민족화해위원회는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봉헌되는 매주 화요일 오후 7시 미사를 민족화해미사로 봉헌하고, 민족화해학교를 설립했으며, 나눔 운동을 실천했다. 또한 최 대주교는 꾸준히 북한과 대화를 시도한 끝에 1998년 5월 북한의 조선 천주교인협회 중앙위원회의 초청을 받아 남한교회의 고위성직자로서는 최초로 북한을 방문했다.
사회사목을 하며 지존파로 알려진 김기환(바오로)·문상록(라파엘)씨에게 세례를 베푼 최 대주교는 날로 높아지는 사형 찬성의 여론에 우려를 표했다.
“책임전가고 적반하장이라고 봅니다. 이 사회와 부모들이 아이들 인성교육을 어떻게 시키고 있나요? 정말 따뜻한 이웃이 있었는가 물어봐요. 기회를 박탈한 거예요. 그 아이들의 권리를 박탈한 겁니다.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는 자격과 능력을 갖추도록 권리를 갖고 태어났는데 그 권리를 빼앗은 사회가 책임을 져야죠. 우리 사회가 ‘미우니까 너 없어져’ 이렇게 말하는 건 아니에요. 우리 그리스도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면 안 돼요.”
최 대주교는 2000년 11월 윤공희 대주교에 이어 광주대교구장직을 맡았다. 이후 1년 6개월간 96개에 이르는 교구 내 본당을 방문한 최 대주교는 지역별 특성을 감안한 ‘지역 특성화 사목’을 내세웠다. 또한 5·18을 영성화하기 위한 노력들을 기울였다.
“제가 여기 올 때 본당이 91개고 공소가 110개였습니다. 사목적인 판단에서 신부는 본당에만 안주하지 말고 선교사적인 사명을 갖고 사목현장을 찾아가야 할 필요를 느꼈죠. 그래서 도서지방과 여러 공소들을 묶어서 본당으로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공소를 공소로 키우는 것이 아니라 목자를 중심으로 한 소사목구로 성장시키려고 했죠. 신부들이 본당 중심이 아니라 교우 중심의 사목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했어요.”
최 대주교는 신앙의 해를 맞아 신자들에게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격·은혜를 제대로 깨닫는 것이 신앙의 해이고 세례 받은 사람의 특권”이라며 “온 마음을 담아서 아버지를 불러보라”고 말했다.
광주대교구는 제8대 교구장을 역임한 최창무 대주교의 사제수품 50주년을 맞아 16일 오전 11시 임동주교좌성당에서 기념행사를 연다. 기념행사는 감사미사와 축하식, 축하연 순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교회소식
교구[가톨릭신문] 사제서품 50주년 금경축 맞은 전 광주대교구장 최창무 대주교
- 작성자 : 관리자
- 등록일 : 2013-05-02
- 조회수 : 705
사제서품 50주년 금경축 맞은 전 광주대교구장 최창무 대주교
“화해·용서는 인간의 근본적 요청”
16일 임동성당서 금경축 미사
1963년 독일서 사제서품
교우 중심·지역특화 사목 강조
평화의 싹 심기 위한 ‘부르심’
대사회적 ‘열린 교회’ 지향
민족화해·사형제 폐지 촉구
퇴임 후 한적한 곳에서 생활
텃밭 가꾸며 미사 봉헌하는
어릴적 소망 이루며 살고 있어
16일 임동성당서 금경축 미사
1963년 독일서 사제서품
교우 중심·지역특화 사목 강조
평화의 싹 심기 위한 ‘부르심’
대사회적 ‘열린 교회’ 지향
민족화해·사형제 폐지 촉구
퇴임 후 한적한 곳에서 생활
텃밭 가꾸며 미사 봉헌하는
어릴적 소망 이루며 살고 있어
발행일 : 2013-04-14 [제2841호, 20면]
▲ 전남 나주 ‘베타니아의 집’에서 텃밭을 가꾸며 지내는 최창무 대주교.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어릴적부터 꿈꾸던 삶을 살고 있다고 말했다.
김진영 기자 (nicolao@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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