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중 광주대교구 3위 순교자들
유문보 바오로 순교일 : 1872.3.20 ~ 4.16 / 옥사
자를 ‘윤보’(允甫)라 하고, 혹은 ‘작객’이라고도 불리던 유(柳)문보 바오로는 박해를 피해 전라도 영광과 충청도 남포 등으로 이주하였다가, 장성 삭별리에 정착하여 신앙 생활을 이어왔다. 그러던 중 1871년 11월(음력) 신미년의 박해 때 장성 삭별리에서 한 동료의 밀고로 체포되어 나주로 압송된 유문보는 읍내 감옥에서 유치성 안드레아와 강영원 바오로, 그리고 다른 동료들을 만난다.
그곳에서 만난 유치성, 강영원과 함께 나주진영 영장에게 자주 불려가 신문을 받았는데, 혹독한 형벌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받았지만 교우들을 밀고하지도 않았고 ‘국법대로 사형을 내려주옵소서’라고만 대답하였다. 그러는 동안 그는 형벌로 인해 팔이 부러지기까지 하였다.
이후에도 다시 영장 앞으로 끌려가 형벌과 문초를 받게 되는데,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며 배교하지 않았다. 더욱이 그는 발등을 불로 지지는 형벌을 받아 살이 타고 진물이 흐를 정도가 되었지만,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이렇게 옥에 갇혀 지내던 중, 유문보는 혹독한 고초로 인해 병이 들었고, 교우들이 그의 임종을 도와 권면하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를 부르다가 옥에서 선종하였다. 이때가 1872년 3월 20일(음력 2월 12일)과 4월 16일(음력 3월 9일) 사이로, 당시 그의 나이는 60세였다.
유치성 안드레아 순교일 : 1872.4.16 / 백지사
자를 ‘치경’이라고 하는 유(柳)치성 안드레아는 경상도에서 태어났으며, 부모로부터 신앙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그의 나이 겨우 두 살이 되었을때, 경상도에서 일어난 1827년의 정해박해로 부모가 체포되어 충청도로 유배를 가게 되면서 충청도에서 성장한다. 후에 그곳을 떠나 전라도 무장의 암티점(현 전북 고창군 성송면 암치리)으로 이주하여 살았는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으며, 회장 소임을 맡아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1871년에 일어난 신미박해로 다음해 1월 2일(음력 1871년 11월 22일) 나주 포교에게 체포된다. 이때 포교가 그에게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하고 교우들이 있는 곳을 밀고하라’고 하였으나, 그는 ‘절대로 배교할 수 없고, 교우들이 있는 곳도 말할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나주로 끌려간 유치성은 그곳 진영의 옥에 갇혔고, 이곳에서 유문보 바오로와 강영원 바오로를 만난다. 이후 그들은 여러 차례 혹독한 형벌을 받았지만, 서로의 신앙을 북돋우면서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유치성과 두 동료들이 영장 앞으로 끌려가 형벌과 문초를 받게 되었을 때 영장이 ‘너희들은 진실로 천주 신앙을 믿느냐?’고 묻자, 그들은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였고, 또 영장이 ‘이후에도 천주 신앙을 믿겠느냐?’고 묻자, 그들은 다시 ‘만 번 죽더라도 천주 신앙을 믿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영장은 너희들을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하면서 혹독한 형벌을 가하였고, 더욱이 그는 발등을 불로 지지는 형벌을 받아 살이 탈 정도가 되었지만, 꿋꿋하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러던 중 유문보가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먼저 병으로 옥사하였고, 얼마 뒤 그는 강영원과 함께 나주의 군사 훈련장이요 형장이었던 무학당으로 끌려나갔다.
이곳에서 영장은 유치성과 강영원에게 마지막으로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요하였으나, 그들의 신앙은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다. 이에 이미 태장(笞杖) 30여 대를 맞아 정신이 혼미할 지경인 그들에게 영장은 백지사형(白紙死刑)을 내렸다. 이 형벌로 인해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72년 4월16일(음력 3월 9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7세였다.
강영원 바오로 순교일 : 1872.4.16 / 백지사
자를 ‘영운’(永云)이라 하고, 혹은 ‘성운’이라고도 불리던 강영원(姜永源) 바오로는 본래 충청도 홍산 태생으로, 부모 때부터 천주교에 입교하여 신앙 생활을 하던 중 부모가 홍산에서 순교하였다. 이에 바오로는 집안에 있는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전라도 용담(현 전라북도 진안군 용담면)으로 이주하였으며, 그 후 다시 정읍 남면 이문동으로 이주하여 임군명 니콜라오의 집에서 품을 팔며 살았다.
강영원은 젊어서 상처하여 혼자가 되었으나, 20여 년이 되도록 재혼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천한 일을 즐겨하면서 주님의 뜻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신자들과 함께 기도할 때면, 항상 겸손과 극기의 자세로 남보다 더 열심히 하였는데, 그는 교우들을 만나면 자주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한다.
“나의 소망은, 박해를 당하게 되면 주님을 위해 순교하는 것입니다. 지존하고 위대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수난을 받으셨으니, 나같이 비천한 사람이 어찌 예수 그리스도의 표양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신미박해가 한창이던 1872년 1월 3일(음력 1871년 11월 23일), 강영원은 여느 때와 같이 교우들과 함께 임군명의 집에 모여 기도를 하던 중 포교들이 몰려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에 성교예규와 다른 천주교 서적들을 챙겨 피신할 준비를 하다가 임군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본래 포교들은 임군명을 체포하려고 왔으나, 강영원도 천주교 신자인 것을 알고는 함께 체포하여 나주로 압송하였다.
그때 신발도 없이 눈길을 걸었던 그에게 한 아전이 버선을 벗어 주자 한 포악한 포교가 버선을 칼로 찢으려 하다가 그의 발바닥을 베고 말았다. 나주까지 이송되어가는 동안 포교의 이러한 행패는 계속되었지만, 강영원은 이를 잘 참아냈다.
나주 진영에 도착하여 옥에 갇힌 강영원은 그곳에서 유치성 안드레아과 유문보 바오로. 그리고 다른 동료들을 만났고 이후 그들은 여러 차례 혹독한 형벌을 받았지만, 다른 교우들과 달리 서로의 신앙을 북돋우면서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어느 날 강영원은 영장에게 불려나가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당하는데, 이때 영장이 ‘천주교를 가르쳐 준 사람은 누구이고, 책은 어디에서 났으며, 동료 교우들은 모두 어디에 있느냐?’고 추궁하자, 그는 ‘천주교는 부모에게서 배웠는데 모두 체포되어 죽었으며, 책은 집안에서 내려오던 것이고, 가르친 사람이나 아는 동료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뿐만 아니라 십계명을 외우면서 “사람으로서 이러한 도리를 어찌 받들어 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옷이 벗겨진 채로 앞뒤 가슴을 매로 맞는 등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으나, 조금도 굴복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이름을 소리 내어 외웠다.
옥에 갇혀 있을 때면, 그는 동료들과 편안한 마음으로 함께 기도를 바치곤 하였다. 그러다가 기한이 심하여 세상 복락을 생각하게 되자, 그들은 ‘우리가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모두 유감을 입은 것이니 이 유감을 물리치고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자’고 서로를 권면하였다. 또 그는 포졸들이 음식을 끊어버린 후에는 다른 교우들의 밥을 조금씩 얻어먹으면서도 항상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였다. 그러던 중 동료 유문보가 형벌을 받고 병이 들어 위중하게 되자, 밤낮으로 그를 돌보아 임종을 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 유치성과 함께 무학당으로 끌려나와, 마지막으로 형벌을 받으면서 배교를 강요받았으나 신앙을 굳건히 지켰다. 그들은 영장의 지휘 아래 태장(笞杖) 30여 대를 맞고 정신을 잃은 뒤 백지사형(白紙死刑)을 받아 순교하였다. 이때가 1872년 4월 16일(음력 3월 9일)로, 당시 바오로의 나이는 50세였다.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중 광주대교구 5위 순교자들
학살 추정
안파트리치오 몬시뇰 Msgr. Patrick Brennan
1901년 미국 시카고(Chicago)에서 태어나 1922년 신학교에 입학하여 1928년 12월 8일 졸업과 동시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교구 사제로 사목하다가 1936년에 아일랜드의 골롬반 외방선교회에 입회한 브렌난 신부는,
이듬해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광주에 머무르면서 한국어와 풍습을 익혔다. 그러다가 1938년에 골롬반회에서 강원도 원주본당(현 원동)에서 사목을 담당하게 되자 그곳으로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일제 총독부에 의해 준적성국 국민이라는 이유로 종교탄압을 받은 뒤 이듬해 4월 본국으로 추방되었다. 8·15 광복 이듬해, 다시 한국에 파견된 브렌난 신부는 1947년 골롬반 외방선교회 아시아 지부장으로 임명되어 중국 상해에서 거처하다가 1949년 11월 2일 제4대 광주 지목구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몬시뇰 칭호를 받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당시 골롬바노회 한국 지부장이었던 지 신부(Brian Garaghty)는 젊은 신부들을 6월 26일 비행기 편으로 일본으로 피난시키고 동료 하이워드(Hayward) 신부와 함께 6월 30일 저녁 시에 목포에 도착하였으나 더 안전한 곳을 찾아 부산으로 떠나면서 안 교구장에게 뒤따라 올 골롬바노 젊은 신부들을 부탁하며 떠났다. 이러던 중 상황은 더욱 악화가 되어 전국 각지에서 성직자들이 공산당들에게 체포되었고, 광주교구도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7월 16일 당시 미 대사관 부영사였던 맥도날드(McDonald)가 군산에서 목포에 있는 광주교구청을 찾아와 더 이상 목포를 방어할 수 없으니 이 지역의 모든 외국인들은 피난을 가라는 주한 미국 대사 무치오(Muccio)의 명령을 전하였고, 얼마되지 않아 경찰이 와서 군산도 인민군에게 점령되었음을 알려주었다. 이에 안 교구장은 현(Harold Henry) 신부에게 목포에 모여 있는 골롬바노회 신부들을 부산으로 데리고 가도록 지시하였다.
부산으로 피난길을 떠나는 현 신부에게 안 교구장은 가능하면 시골본당까지 가서 한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제를 피신시켜달라는 당부를 하였다. 그러나 정작 함께 떠나자는 현 신부의 권유에는 "자신은 머무르는 것이 사명이라"하며 목포 주교관을 떠나는 것을 거부하였다.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일이 악화되면 섬으로 피신 할 것이니 걱정 말라"하며 오히려 사람들을 위로하였다.
7월 24일 새벽, 주교관에서 무릎을 꿇고 로사리오 기도를 바치고 있던 안교구장은 주교관 요리사로부터 인민군이 목포에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처음에는 "종교의 자유를 반대하지 않는다."고 하며 성당에 왔다가 돌아갔다. 다음날 그들은 당시 목포 본당의 주임신부였던 고 신부(Thomas Cusack)와 보좌 신부였던 오 신부(John O'Brien)를 불러내어 목포 시내를 돌며 행진하게 하였다. 그 이유는 아군의 불시 습격이나 총격 등을 주교와 신부들을 방패로 삼아 막아보자는 속셈과 아울러 시민 중 누가 천주교 신자인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다음 주일 미사 때 인민군들이 와서 고 신부에게 신자 명단을 요구하였고 고 신부가 이를 거절하자 인민군들은 사제들을 연행하였다. 사제들은 목포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되었다가 광주교도소로 이송되었다. 그 후 목포 신자들은 세분 성직자들의 행방을 알 길이 없었다. 그러던 중 이 세 분 성직자들의 행방은 한국 전쟁이 끝난 후에 장옥석 신부의 증언과 미군 마카루미 중위의 자필증언 에 의하여 밝혀졌다.
미군 마카루미 중위는 하동에서 체포되어 8월 26일 밤 광주교도소로 이송되어 한방에 들었는데 그곳에서 안 브렌난, 쿠삭, 오브라이언이라는 세분의 성직자를 만났다고 하였다. 신부들은 감방 안에서 서로를 격려하며 중위와 다른 사람들에게도 성직자로서 사랑을 나누고자 하였다. 8월 치고는 추운 밤이었는데 감방에는 세 장의 담요밖에 없는 상황에서 세 성직자들은 다른 수감자들을 위해 양보하였다. 안 교구장은 유치장 창밖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를 들으며, 곧 즐거운 소식이 있을 터이니 염려 말라는 말 등으로 다른 수감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유엔군은 날마다 광주 상공을 날며 기총소사를 하고, 북한의 요새를 폭격했다. 이러한 유엔군의 반격이 심해지던 어느 날 공산주의자들은 신부들과 미군들 그리고 24명의 한국인 등을 수갑을 채우고 밧줄로 묶어 망가진 트럭에 태워 유엔군 비행기의 폭격을 피해 밤에만 서울로 이동을 하였다. 이동한지 이틀째 되던 날 대전 부근에 이르렀을 때 트럭이 완전히 부서져서 걸어서 이동을 하였다. 안 교구장은 나이도 많고 영양실조로 인해 거의 탈진상태였지만 남을 도우려 애썼다. 마카루미 중위는 대전까지 세신부와 함께 했으나 미군들이 유엔군 포로수용소로 합류하게 되어 세 분 성직자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라고 증언 하였다.
그 후 충주법원 검사의 부인이 9월 24일 프란치스코 수도원에 감금되었다가 임산부라고 하여 석방되었는데, 이 부인이 목동본당의 교우들과 오기선(요셉) 신부의 모친에게 이 세 외국인 신부들을 보았다고 전해 주었다.
1950년 9월 24일에서 26일 사이에 인민군들이 후퇴하면서 대전형무소와 대전 목동 프란치스코 수도원에서 1200명을 학살하였다. 아마도 세 신부들은 그 와중에 프란치스코 수도원에서 피살된 것으로 추측되어 나중에 그 시신을 수습하려고 노력하였지만 찾지 못하였다.
학살 추정
고토마스 신부 Thomas Cusack
1910년 아일랜드의 클레어(Clare) 주에서 출생, 1932년에 성골롬반 외방선교회 본부가 있는 달간 파크(Dalgan Park)의 선교회 신학교를 졸업한 후 1934년12월 21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1935년 한국에 입국한 뒤 1939년 저전동 본당 4대 주임을 시작으로 광주 지목구 소속의 여러 본당을 맡아 사목 활동을 폈다. 1946년 4월 부임하여 1947년 1월까지 북동본당에서 사목하였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신자들로부터 성인사제라고 불리울만큼 사랑과 정성이 지극하였다. 매일매일 쉴 틈 없는 바쁜 일정에도 성인 교리반과 학생반을 지도, 본당 신심단체 성심회 지도, 세례 준비반 지도, 성당 30km이내에 거주하는 환자 돌보기, 소년원생과 매일 대화하기, 목포 전교회 본부 방문하기 등 많은 활동을 하였으며 특히 냉담자 가정은 1주일에 두 번씩 방문하여 상담도 해주고, 가정을 방문했을 때 쌀독을 열어봐 쌀이 없으면 다른 사람을 시켜 쌀독에 쌀을 채워주는 자상함 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영성생활과 어렵고 가난한 신자들을 남모르게 도와주곤 하였다.
전쟁으로 인하여 본국으로 추방된 고 신부는 그 곳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오직 한국교회의 성장과 신자들의 염려 뿐이었다고 한다. 다시 한국에 오게 된 고 신부는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목포 본당(현 산정동본당)의 13대 주임 신부로 재직하고 있었다.
고 신부는 전쟁이 발발하자 안 브렌난 몬시뇰과 함께 본당을 지키며 교구장을 보좌하며 하느님을 증거 하였다. 그러던 중 1950년 7월 30일 주일미사 때 인민군들이 요구한 신자명단 제출을 거부하여 안 브렌난 몬시뇰과 당시 목포 본당(현 산정동 본당) 보좌신부였던 오 브라이언 신부와 함께 체포 되었다.
『체포되기 하루 전날 고 신부와 오 신부는 성체를 다 영하여 거두고 성당문을 나서는데 인민군들이 총을 들이대고 손을 들라 하고는 끌고 다니며 유달산으로 올라가 무전기를 감춘 비밀 장소를 대라면서 자기들 멋대로 온 산을 끌고 다녀 거름통에도 빠지고 가시에 긁히기도 하여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저녁에야 돌아와 "참 죽기도 어려워요"라고 말씀하시며 한숨을 쉬었다』라고 당시 목포 본당(현 산정동 본당) 수녀원 분원장 한 마리아 수녀는 증언하였다.
고 신부는 인민군들에게 끌려 다니면서도 신자들에게 피해가 갈까 조심하였고 신자들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한다. 당시 목포 죽교동 2구 반장으로 봉사했던 박영님(율리안나)의 증언에 의하면 인민군들에게 끌려 다니는 신부들이 안쓰러워 신자들이 자기들의 집에 신부들을 숨도록 조치하려 했으나 신자들에게 피해가 갈 것을 염려하여 이를 일체 거절했다고 한다. 그 예로 대성동 파출소 앞에 위치한 양 데레사라는 신자의 가게에 들렀는데 얼굴은 피땀으로 범벅이 되 있었고 수단에는 온갖 오물이 다 묻어있던 고 신부는 잠시 들려 물만 마시고 즉시 떠나버렸다고 한다. 그곳에서 잠시 몸을 숨길 수 있었으나 혹여 선의를 베풀었던 신자에게 위험이 갈 것을 염려한 목자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신부들의 모습은 신자들의 눈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 다음날 신자 명단을 제출하라는 인민군의 요구를 거부하여 세 성직자는 연행되었고, 연행되는 그 순간에도 고 신부는 자기들의 수감으로 신자들이 성사 생활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며 염려하였다고 한다. 고 신부는 안 몬시뇰과 보좌신부였던 오 요한 신부와 1950년 7월 27일 피랍되어 내무서로 끌려 간 후 광주를 경유하여 대전으로 끌려갔는데 1950년 9월 24일에서 26일경 대전의 목동 성 프란치스코 수도원에서 대학살이 자행될 때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되며 사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학살 추정
오요한 신부 John O'Brien
1918년 아일랜드에서 출생, 1942년 12월 21일 성 골롬반회 선교 사제로 서품 되었다. 목포본당 보좌 신부로 재직 중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오 신부는 안 몬시뇰, 고 신부와 함께 목포 본당을 지키다가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당시 목포에 있는 교우들은 주교와 신부들에게 피난가길 몇 번이고 간청하였으나, 주교님은 "양들을 놔두고 어디를 가란 말이냐?"하며 움직이려 하지 않았고 주임사제 고 신부는 "주교님이 움직이지 않으시는데 어찌 나만 피난을 가야 하는지요?" 하면서 거절하고 보좌신부였던 오 신부 역시 같은 생각으로 피난을 가지 않았다.
당시 목포성당(현 산정동 본당) 분원장이었던 한 마리아 수녀의 증언에 의하면 본당신부였던 쿠삭 고 신부와 보좌 신부였던 오'브라이언 신부가 끝까지 본당을 지킬 결심을 하였고, 그 옛날 탱크도 운전했었던 건장한 체격의 오브라이언 신부는 피신 가지 않은 본당수녀에게 치명하겠느냐고 물으며 용감히 치명하겠다는 수녀에게 치명할 결심이면 성사를 보라며 권유하였다한다. 오'브라이언 신부는 이미 사태를 알고 영혼 하나라도 더 구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치명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해 주며 인민군들이 아무리 부정한 일을 강요해도 마음으로 동의하지 않으면 죄가 안 되니 안심하고 하느님을 찾으며 치명하라고 다정한 아버지와 같은 표정으로 알려주었다.
함께 수감생활을 광주에서 하던 미군이었던 마카루미 중위의 증언에 의하면 몬시뇰과 두 사제는 첩보원으로 취급당하고 왜 결혼하지 않고 일도 하지 않고 백성들의 돈으로만 살아가느냐고 심문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성직자로서 서로서로를 격려하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성직자로서 사랑을 나누고자 하였다. 세분의 성직자들은 지급된 담요 3장을 다른 수감자들이 덮도록 양보하였다. 안 몬시뇰이 유치장 창밖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를 들으며,"곧 즐거운 소식이 있을 테니 염려 말라"는 말에 오신부는 타고난 좋은 목소리로 "Far Away Places"라는 노래 등을 부르며 수감자들의 향수를 달래주고자 노력하였다.
사제들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고 유엔군의 폭격이 심하여 천지가 진동하는 폭음이 지척 간에 들려도 동요하지 않고 기도를 열심히 하였다고 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신앙 안에서 죽음의 순례를 하던 사제들은 대전 목동 프란치스꼬 수도원에서 순교하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확한 기록은 모르지만 1950년 9월 24일에서 26일 사이에 공산군의 학살 때 순교하신 것으로 알려졌는데 시신은 찾지 못하였다.
피살
전기수 그레고리오 신학생 全基洙
전기수 신학생은 나주군 나주면 보산리 125번지에서 1922년 12월 29일 출생하였다. 서울 가톨릭 대학에 진학하여 1950년 5월 28일 시종직 4품을 받고 수학을 하던 중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이 나자 신학교는 휴교하고 신학생을 귀가 조치 시켰다. 전기수 신학생과 고광규 신학생은 1950년 9월 25일 전주에서 체포되어 구금되었다가 공산군에게 학살당했는데 이와 같은 사실은 당시 함께 전주까지 같이 피난 왔던 동창생 김정용 신부의 증언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우리 세 사람이 전주에 도착한 것은 9월 20일 경이었습니다. 우리들은 곧 나의 매형 주선으로 전주 전동 골방에 피신처를 정했습니다. 나는 전주에 도착하여 5일째인 9월 25일 바로 다음날은(26일) 추석명절이요, 우리 79위 복자의 축일이므로 이날을 좀 더 뜻있게 지내보려는 심정에서 혼자 피신처를 나왔습니다. 나는 추석 준비를 해보겠다고 나왔으나 어수선한 거리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경솔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느꼈으며, 주위 사람들도 만류하여 시내에 들어가지 않고 교회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 10시경 끔찍하고 무서운 소식이 나의 처소에 날아 왔습니다. 두 동료가 모두 체포되어 예수 병원자리 소위 정치보위부에 압송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사제관 주방 담당 아가씨에게 들은 그들의 체포 경위를 말하겠습니다.
9월 25일 오후 전기수 신학생은 서울에서 20여일이나 많은 신세를 지고 왔던 ‘만념상회’의 송경섭(루가)씨 댁 소식을 그 댁의 처제되는 성심여중에 근무하는 최 수녀님(대구교구 소속인 최봉도 신부의 고모)께 전하고자 피신처를 나와 최 수녀의 은신처로 찾아가던 중 그만 공산당에게 체포되어 정치보위부에 끌려가서 온갖 신문과 고문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 후 고 베드로도 체포를 당한 것은 물론입니다.
이 두 신학생 보다 앞서 체포되어 이들과 함께 감방생활을 하였던 강 수녀(살트르 성 바오로 회 수녀로 당시 전동본당에서 활동)는 당시 이들의 수감 모습과 거동을 나에게 다음과 같이 전해주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식사를 받자 전기수 신학생은 열심히 식전 축문을 외우고 성호를 그으며 이 음식을 먹고 순교할 각오를 하자고 신덕(信德)에 불타는 열변으로 고요히 말하고 조금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태연했습니다.’
27일 오후 5시경, 전주 형무소의 문이 개방되고 공산군이 도주한다는 희소식이 전해지고, 28일 유엔군의 진주를 환영한다고 전주 시내가 야단이었습니다. 이때 나는 나에게 가장 급한 문제가 두 동료를 찾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먼저 형무소로 가서 찾아보았으나 두 신학생이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여러 곳을 찾아 헤매다 희망을 걸고 예수병원 자리로 가보았습니다. 이 곳은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라 온 산을 다 찾아본 결과 산언덕 방공호 속에 학살된 시체가 무수히 많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 시체들을 헤쳐 보았더니 참혹하게도 줄줄이 묶은 시체 중 맨 첫 번째에 전기수 그리고 두번째에 고광규 두 신학생의 시체가 있었습니다. 시체가 부패했어도 고광규 신학생은 곧 알아볼 수 있었으나 전기수 신학생은 알아볼 수 없었는데, 내가 전해준 바지를 입고 있었기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두 분의 시체는 부패하였으나 온 몸이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고, 머리가 상한 것으로 보아 타살된 것이 분명했습니다. 이 두 신학생은 부주교 이상화(李尙華, 바르톨로메오) 신부의 주례로 연미사를 봉헌하고 수많은 신자들이 뒤를 따르는 애도와 눈물 속에 치명자 이 누갈다의 무덤 아래 고이 안장했습니다.』
1950년 9월 26일 전주 예수병원 방공호의 굴에서 28세의 나이로 순교한 전기수 신학생은 전주 성직자 묘 아래 1차로 모셔졌다가, 현재는 담양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피살
고광규 베드로 신학생 高光圭
고광규 신학생은 1925년 7월10일 목포시 양동 125번지에서 출생하였다. 서울 가톨릭 대학에 진학하여 삭발례 품을 받고 신학생으로 수학을 하던 중 한국 전쟁의 발발로 전주로 피난하였다가 1950년 9월 25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었다. 체포 과정은 위의 전기수 신학생의 내용과 같다. 1950년 9월 26일 전주 예수병원 방공호의 굴에서 25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전주성직자 묘 아래 1차로 안장되었다가 목포 연산동을 거쳐 현재는 담양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