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허락하신 매순간이 '꽃자리'였습니다"
"그 때가 1963년입니다. 독일 유학 중 독일에서 사제품을 받았죠. 일주일 뒤 첫 미사를 하는데 신자 중에 한국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첫 미사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사제수품 50주년(금경축)을 앞둔 전 광주대교구장 최창무 대주교는 사제서품식과 첫 미사를 떠올리며 사제로서 초심을 돌이켰다. "50년 밥값을 했는가 생각하면 쑥스럽고 송구스럽다"면서 "그저 감사할 뿐이다"고 말을 이었다. "50년간 사제로 봉사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불러주시고 이끌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키워주신 교회와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광주대교구는 16일 오전 11시 임동주교좌성당에서 최 대주교 금경축 미사와 축하식을 거행한다. 금경축을 앞둔 최 대주교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2010년 광주대교구장에서 물러난 최 대주교는 현재 전남 나주시 노안면에 있는 숙소 '베타니아의 집'에서 생활하고 있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
최 대주교는 광주대교구장 이임 감사미사 때 신자들에게 "이제 대주교가 아닌 여러분과 함께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말했다. 어린 시절부터 성소의 꿈을 키우던 최 대주교가 상상하는 사제의 모습은 신자들과 동고동락하며 넉넉한 미소를 띤 본당 신부였다. 하지만 정작 그는 사제생활 50년 동안 본당 주임을 맡아본 적이 없다. 가톨릭대 신학대에서 후배 사제들을 양성하며 25년을 지냈고 이후 서울대교구 보좌주교, 광주대교구장에 임명됐다.
"하느님께서 이제야 신자들과 함께 살라고 저를 보내주시네요. 풋내기의 소망을 이뤄주시는 걸 보면 하느님께서 얼마나 자비로우신지 감탄스러울 따름입니다."
최 대주교는 사제수품 50주년이 됐지만 사제로서 갈 길은 아직 멀었다고 했다. 미사를 봉헌하면서 그리스도로서 사는 사제직의 의미를 나이가 들수록 새롭게 깨닫게 된다고 했다.
"사제는 예수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 죽음으로 삶을 완성하신 예수님처럼, 우리 사제도 스스로 죽으면서 미사를 통해 그리스도와 일치해야 합니다. 내가 삶의 주인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교회의 것임을 인식하며 삶에 순응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기도도 점점 단순해졌다. 역시 주님의 기도만 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 대주교는 "주님의 기도는 기도 중의 기도"라고 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고 시작하지 않습니까.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격이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졌습니다. 특권입니다. 입으로만 바치지 말고 온 마음을 다해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최 대주교는 가톨릭교회 격변기를 온몸으로 겪은 세대다. 어렸을 적 미사에 참례하면, 주임 신부는 제대를 향해 라틴어로 미사를 집전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례개혁 이전 모습이다. 사제품을 받을 땐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사제가 될 때까지 내내 라틴어 미사를 봉헌했는데 1969년 독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니 한국어로 미사를 집전해야 했다.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려니 어색하기도 하고 힘이 들더라고요. 하지만 교회 성장을 위해선 변화는 당연합니다. 물론 성장엔 성장통이 따르기 마련이지요. 다름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철 따라 사는 것이 철 드는 것이에요.(웃음)"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널리 전하는 것이 사목자로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는 최 대주교는 서울대교구 보좌주교 시절 사회사목에 헌신했다. 사회교리학교와 참생명학교를 시작하며 신자 교육에 힘썼고, 남북 화해를 위해 민족화해위원회를 설립, 위원장을 지내며 남북 간 일치에도 앞장섰다.
최 대주교는 "남북이 대치하는 현재의 위기 상황이 안타깝다"면서 화해와 용서가 바탕에 깔린 대화를 강조했다.
"민족화해위원회를 꾸려 가면서 우리 후손에게 원한을 유산으로 물려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평화, 화해, 용서를 가르쳐야 했지요.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은 죄를 용서받고 새로 태어나지 않았습니까. 북한과는 한 형제입니다. 화해의 문을 먼저 열고 기도하며 대화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최 대주교는 광주대교구장을 지내면서 교구 사회복지재단을 만들었고 사회사목 분야 전문가를 길러냈다. 5ㆍ18 기념성당을 건립해 광주 시민의 아픔을 보듬기도 했다. 그러면서 교구 사제들에게 늘 신자 중심의 사목을 당부했다.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것을 기뻐했던(콜로 1,24) 사도 바오로 모범을 본받아 그리스도를 선포해야 합니다."
사제생활 50년, 어느 시절이 가장 좋았냐는 질문에 구상 시인의 시 '꽃자리'가 답으로 돌아왔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랍니다. 교구장 주교님께서 보내주신 그 자리가 늘 제일 좋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지금이 제일 좋고요."
▨최창무 대주교 약력 ▲1936년 경기도 파주 출생 ▲1963년 사제수품 ▲1969년 독일 프라이부르크대 대학원 졸업(윤리신학 박사) ▲1970~1995년 가톨릭대 교수ㆍ학장ㆍ총장 ▲1994년 서울대교구 보좌주교 수품 ▲1995~1999년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 ▲1999년 광주대교구 부교구장 대주교 임명 ▲2000년 광주대교구장 착좌 ▲2002~2005년 주교회의 의장 ▲2004~현재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위원 ▲2010년 3월 25일 광주대교구장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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