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소식
교구[경향뉴스] 사제서품 60주년 맞은 ‘광주의 대부’ 윤공희 대주교
- 작성자 : 관리자
- 등록일 : 2010-03-22
- 조회수 : 712
“서품받을 때 가장 기뻤고, 5·18 때 제일 힘들었다”
사제로서만 60년을 살아온 분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여든여섯의 그 어르신이 전하는 달고 쓴 인생의 맛은 또 어떤 것일까.
윤공희 대주교.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을 맞았지만 가족을 남겨두고 단신으로 월남했다. 신부가 되어 한국전쟁과 4·19 혁명을 겪고 1970년대의 군부통치시절을 견뎌냈다. 80년의 봄, 윤 대주교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그 한복판에 있었다. 언론마저 입을 다문 그때, 정부와 군인들의 만행을 질타하고, ‘광주의 진실’을 세상에 알렸다. 사람들은 그를 ‘광주의 대부’로 기억한다.
윤 대주교가 20일로 사제서품 60주년을 맞는다. 가톨릭에선 사제서품 25년이면 은경축, 50년이면 금경축으로 축하받는다. 금경축을 지나고도 10년, 사제서품 60주년은 특별한 이름이 없단다. 이름을 붙이기엔 너무나 그 의미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9일 남녘으로 멀리 달려 전남 나주시 남평읍 광주가톨릭대 주교관에서 윤 대주교를 만났다.
특유의 소박하고 인자하게 느껴지는 미소, 낮은 목소리로 “먼 데서 오셨네”하며 반갑게 맞는다. 건강한 모습이다. “특별히 운동을 하는 것은 없고, 그저 주교관 주변을 왔다갔다 자주 걷는답니다. 산에 가는 것은 좀 무리가 되고. 그래도 초대교회 유적지를 둘러보기 위해 최근 터키까지 갔다왔어요. 지난주에는 지리산 피아골 피정의 집에도 갔었지.” 주교관 1층의 접견실에는 곳곳에 책이 아주 많다. “읽는 것은 되는데, 이젠 원고를 쓰기는 힘드네요. 허허허.”
-사제서품 60주년, 소회가 특별할 것 같은데요.
“특별한 소회라, 평균수명이 늘어나 60년을 맞는 것 아닐까요, 허허. 솔직히 뭐 그리 특별한 소회는 없어요. 그저 하느님의 은혜로 이렇게 건강하게 지내고 있어 늘 감사할 따름입니다.”
-어릴 때부터 사제를 꿈꾸셨습니까. 아니면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나요.
“부모님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집안에 신앙적 열성이 넘쳤죠. 그래서인지, 어릴 때부터 당연히 신부를 해야 하는가보다, 신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아요. 더 어릴 때는 ‘아, 신부가 많이 좋은 것인가보다’하고 생각하기도 했고.”
-서품 받을 때의 그 순간, 또 첫 미사 때는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요.
“1950년 3월 서울 혜화동 대신학교 성당에서 서품을 받았죠. 구체적으론 기억나질 않아요. 신부가 됐구나하는 생각…. 조금 일찍 서품을 받았으면 공산정권에 잡혔겠구나, 다행이다, 그런 생각이 강했기 때문일 겁니다. (북한에선 49년부터 탄압이 시작돼 신학교·수도원이 폐쇄되고 성직자들이 붙들려 갔다. 윤 대주교는 50년 1월 지학순 주교와 어려움을 뚫고 월남했다) 죽음의 고비를 넘긴 것은 순교자분들의 몫까지 살아야 한다는 하느님의 뜻이라는 생각을 항상 했기 때문이죠. 첫 미사는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에서 봉헌했는데, 조금 떨리고, 긴장도 하고. 혼자인 저를 평양과 진남포 출신 신자분들이 성대하게 축하해주셨죠.”
윤 대주교는 지난 삶에서 가장 즐겁고 기뻤던 때를 “서품받을 때”라고 했다. 또 4년여의 로마유학 기간도 “아주 즐거웠다”고 밝혔다.
-어떤 분들은 하느님의 특별한 은혜에 환희감도 경험하셨다고 하더라구요.
“저는 조용하고 평범한 신앙생활인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 의탁해 보람있는 삶이구나,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기쁜 일이구나 하죠. 성격 탓도 있지만, 어릴 때부터의 교육 분위기도 영향을 줬을 겁니다. 덕원신학교의 교수진은 독일인 베네딕도회 신부들이었죠. 분위기는 자유로웠지만 감성보다 이성을 중시했다고 할까요.”
-힘들거나 고통스러웠던 시기도 있으셨을 텐데요.
“책임있는 자리에 있으면서 정확한 판단이 서지 않을 때가 힘들었죠. 초대 수원교구장으로 있으면서 1년은 서울대교구장 서리를 겸임했습니다. 주교직은 목자이면서 교구라는 공동체의 관리자입니다. 재정 문제 등 교회 내적인 문제가 여럿 있었죠. 박정희 정부 말기 인권문제를 둘러싸고 정부와 부딪칠 때도 기억납니다. 80년 광주민주화운동 때가 참 힘든 때였죠…. 교회내에서는 교회의 사회참여가 옳으냐 그르냐 등 의견도 많이 엇갈렸습니다. 결국 판단하고, 결정을 내려야 했죠.”
-외람되지만, 사제로서의 지난 삶에 만족하십니까. 사제복을 벗어던지고 싶었던 때는 없으셨나요.
“아주 만족합니다. 주교가 아니라 신부로서만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허허. 주교도 하느님의 부르심인데, 기쁜 일이죠. 어려울 때는 있었지만 후회는 없어요. 사목의 책임을 피하고 싶은 때도 있었지만, 사제복을 벗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습니다.”
-사제가 뭐가 그리 좋은가요.
“하느님이 주신 특별한 소명, 당신이 특별한 일을 주셔서 일하는 게 사제 아닙니까. 믿음 속에서의 삶이 가장 보람된 삶 아닐까요. 또 많은 분들에게 하느님의 은혜를 전하고 주는 것도 그러하고요.”
-평생을 성직자로 살아오셨는데, 인간 삶에 있어 종교의 역할은 무엇이라 보십니까.
“인간의 가치는 인간다운 삶을 살 때 있다고 봅니다. 인간다운 삶은 결코 물질적 풍요로 모두 충족되는 것은 아니죠. 선을 추구하는 삶일 때가 인간다운 삶, 가치있는 삶입니다. 종교는 그 선에 대한 희망·믿음을 줘야 하고, 또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선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겁니다.”
-말씀하신 선은 무엇인가요.
“누구나 무엇인지 안다고 봅니다. 어떤 행동이든, 생각이든 가질 때 인간에게는 양심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선과 악을 구별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누구나 선과 악을 알고, 양심의 소리를 듣죠. 다만 그에 잘 따르지 못할 뿐이지요.”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30주년입니다. 5·18의 현재적 의미, 5·18에서 무엇을 얻어야 할까요.
“인간의 존엄성, 인권 존중에 대한 교훈이죠. 정치든 무엇이든, 목적이나 방법 모두에서 인권을 존중하는 것이 돼야 합니다. 당시 위정자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나라를 위한다고 했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인권을 유린하고, 자유를 억압했습니다. 평화적 시위를 폭력으로 진압했죠. 아직도 그때가 많이 생각납니다. 5월19일 아침, 금남로 가톨릭센터 6층 집무실에서 계엄군들의 잔악하고 무자비한 탄압행위를 봤습니다. 국민들, 광주 시민들의 고통을 봤습니다.”
윤 대주교는 “그때 이야기만 하면 나도 모르게 혈압이 올라가고, 흥분이 된다. 아직도 이렇다”며 미소를 지었다.
-‘광주의 대부’로 불릴 정도로 역할을 했습니다. 살아오시면서 가장 힘든 때가 판단할 때라고 말씀하셨는데, 당시 억압적 분위기에서 ‘광주의 대부’로서의 역할을 하게끔 한 판단의 기준은 무엇이었습니까.
“시민들의 저 고통을 외면할 수 없다, 고통을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당시 행위는 그 무엇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었죠. 집집마다 찾아들어가 시민, 학생들을 끌어내 잔인한 폭력을 가했죠. 시민들에게 보라는 듯이. 사람들에게 겁을 주려는 것, 바로 민주화 요구를 틀어막으려는 것이었죠. 시민들과 고통을 함께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두가 탄압받던 시절, 누군가는 힘이 돼줘야 했고, 진실을 밝혀야 했습니다. 우리 신부님들이 나섰죠.”
윤 대주교는 현재 우리 사회의 큰 문제로 “사회갈등의 큰 원인이기도 한 빈부격차의 심화”를 꼽았다. “개인들이 더불어 살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지만, 개인들로선 한계가 있어 지도층·지식인들이 제도적 부분을 마련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젊은 사제들, 신자분들께 조언좀 주시죠.
“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세상과 이웃의 기쁨, 고통을 함께 나누고. 기도는 하느님께로 마음을 향하게 하는 것,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항상 하느님과 대화를 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특별히 좋아하는 말씀이 있으신가요.
“좋아한다기보다, 젊을 때는 ‘그리스도의 평화’라는 말을 많이 되뇌었죠.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과 하나될 때 마음의 평화를 이룰 수 있었어요. 나이가 들면서는 ‘하느님,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를 늘 마음 속에 새겼습니다. 어떤 어려움도 넘어설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윤 대주교는 19일 광주가톨릭대에서 신학생들과 사제서품 60주년을 기념하는 조촐한 미사를 갖는다. 4월1일에는 광주대교구가 축하행사를 마련키로 했다. 3년만 더 있으면 윤 대주교는 주교서품 50년. 그야말로 ‘주교 금경축’,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이다. “주교 금경축 인터뷰를 오겠습니다”하고 주교관을 나섰다. 봄 기운이 도는, 이슬비 내리는 뜰에서 큰 어르신이 손을 높이 흔들어 주신다.
나주 | 글 도재기·사진 서성일 기자 jaek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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