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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소식

교구[평화신문] 사제의 해에 돌아보는 한국교회 사제들

  • 작성자 :  홍보
  • 등록일 :  2009-10-16
  • 조회수 :  695
 
 
 
나의 멘토 사제 - 김용배 신부
 
 
 

공의회 따르며 늘 새로운 사목을 …
 
10살 무렵 첫영성체를 한 후 복사가 돼 천방지축 나돌다가도 복사 옷을 입고 제단에 올라가기만 하면 얌전했던 어린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교회가 무엇인지, 사제가 어떤 삶을 사는 것인지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그저 막연하게 복사를 하면서 사제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사제가 된 지 어느덧 20여 년이 지났습니다. 사제로 살아오면서 모든 선후배 신부님들이 제 삶에 모범이었지만 특히 광주대교구 김용배 안드레아 신부님은 제가 사목자의 모범으로 생각하며 자랑하고 싶은 분입니다.
김 신부님은 1962년에 사제로 서품돼 사목하다 1986년경부터 암으로 투병생활을 했고 1988년 선종하셨습니다. 신부님과 인연은 신부님께서 1969년 전남 장성본당 주임으로 부임하면서입니다.
거창하게 신부님과 인연이라고 했지만 10살짜리 복사가 주임 신부님과 인연이라고 할 것이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모든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신부님을 어려워했지만 이제보니 그것이 인연이었던 것입니다. 그 무렵 사제가 돼야겠다는 성소가 시작됐습니다.
 
공의회의 보화 아셨던 사제
 
1978년 광주가톨릭대학(당시 대건신학대학)에 입학하고 첫 여름방학을 맞아 보성본당에 계시는 신부님을 찾아가 뵈었습니다. 장성본당의 꼬맹이 복사가 신학생이 됐다고 자랑스럽게 소개드렸지만 신부님은 저를 기억하지 못하셨습니다.
약간 서운했지만 그때 하얀 모시옷을 입고 성당 마당 평상에서 두꺼운 책을 보고 계시던 모습은 절대로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책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이었습니다.
병아리 신학생인지라 공의회 가르침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몰랐지만 사제가 돼 사목을 하면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의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바로 김 신부님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한국에서는 공의회가 끝난 지 40여 년이 지나서도 그 정신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는다는 자성의 소리가 들리는데 김 신부님께서는 공의회의 보화를 미리 발견하고 그 가치를 드러내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문서선교의 장 열어
 
김 신부님은 광주대교구에서 처음으로 미사 중 5분 교리를 시작했고 세나뚜스 지도신부로서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을 위해 주일 강론과 교리 상식 등을 담은 주보 '빛가정'을 만들어 최초로 문서선교를 시작하신 분입니다. 그 빛가정에 네 쪽의 만화를 직접 그리기도 하셨습니다. 만화를 활용한 것은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 방법이었습니다.
또 가난의 삶도 철저히 사셨습니다. 지금도 신자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이야기는 신부님께서 추운 겨울에도 단벌내의로 버틴다는 것을 안 신자들이 내의를 선물하면 이를 기쁘게 받고나서 포장도 뜯지 않은 채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져다 주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김 신부님을 구태의연하지 않고 끊임없이 공부하면서 새로운 사목을 시도하고 그 누구보다도 공의회의 가르침에 따라 사셨던 사목자로 기억하고 존경합니다. 12월 4일, 김 신부님의 기일입니다.
 

© 평화신문 2009-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