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소식
교구[광남일보] <김前대통령서거> "민주화 헌신한 정치인·훌륭한 신앙인"
- 작성자 : 홍보
- 등록일 : 2009-08-19
- 조회수 : 505
천주교 광주대교구 윤공희 전 대주교는 김대중 전대통령이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정치인이자 훌륭한 신앙인이라고 회고했다. 특히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에서 초청으로 식사를 한 적 있는데 자신의 고생담과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신념, 포부 등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고 회고했다. 최근 피아골 피정의 집에 머무르고 있는 윤 전 대주교로부터 김대중 전대통령에 관한 인연 등 소회를 들어봤다.
△ 요즘 근황은?
주교관 리모델링 공사 관계로 피아골 피정의 집에서 좀 쉬고 있는데 건강은 염려해준 덕분에 괜찮은 편이다.
주교관 리모델링 공사 관계로 피아골 피정의 집에서 좀 쉬고 있는데 건강은 염려해준 덕분에 괜찮은 편이다.
△ 처음 DJ를 알게된 동기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처음 김대중 대통령을 뵌 것은 박정희 정권시절인 1960년대 중반쯤 한번은 이효상 국회의장(제6,7대 국회의장)공관에서 주교들하고 가톨릭 신자 국회의원들하고 만나는 자리에서다. 그때 여러 가지 모양으로 소개하는 날이었는데 국회의장 공관에서 우리가 만난 그날,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김대중 의원이 국회에서 의사일정을 끌어야될 필요성이 있었던 모양이다. 소위 ‘필리버스터’라고 그러지 의원 발언을 통해 4시간인가를 끄는 이야기를 하셨다고 그런데 그 말씀이 억지로 시간을 끄는 것이 아니고, 말씀 하나 하나가 훌륭한 내용이었더라는 것이다. 웅변가라고 칭찬이 자자했다. 그때 처음 만나고 처음 알게 되었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처음 김대중 대통령을 뵌 것은 박정희 정권시절인 1960년대 중반쯤 한번은 이효상 국회의장(제6,7대 국회의장)공관에서 주교들하고 가톨릭 신자 국회의원들하고 만나는 자리에서다. 그때 여러 가지 모양으로 소개하는 날이었는데 국회의장 공관에서 우리가 만난 그날,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김대중 의원이 국회에서 의사일정을 끌어야될 필요성이 있었던 모양이다. 소위 ‘필리버스터’라고 그러지 의원 발언을 통해 4시간인가를 끄는 이야기를 하셨다고 그런데 그 말씀이 억지로 시간을 끄는 것이 아니고, 말씀 하나 하나가 훌륭한 내용이었더라는 것이다. 웅변가라고 칭찬이 자자했다. 그때 처음 만나고 처음 알게 되었다.
△ 그때 DJ에 대한 느낌은?
그때 자세한 기억은 없는데, 그런데 보고 느끼는 것보다 옆에서 소개를 해주는 말로 인상을 받았다. 활력이 넘치는 좋은 정치인인가보다, 신자로서 소개를 받았으니까 가톨릭 신앙인으로서 유능하고 젊은 정치인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고 참 희망적인 일이구나 믿음직스럽게 보였다.
그때 자세한 기억은 없는데, 그런데 보고 느끼는 것보다 옆에서 소개를 해주는 말로 인상을 받았다. 활력이 넘치는 좋은 정치인인가보다, 신자로서 소개를 받았으니까 가톨릭 신앙인으로서 유능하고 젊은 정치인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고 참 희망적인 일이구나 믿음직스럽게 보였다.
△ 사형 언도 당시 교구장으로서 어떤 역할을 했나?
교황님이 구명운동을 직접 했다는 사실은 요즘에 와서 알려진 것으로 당시에는 외교적인 활동을 전혀 공개를 하지 않아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한국내에서도 교회가 어떤 모양으로 노력을 했을테지만 구체적으로 행동을 했는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훌륭한 신앙인이고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정치인으로서 많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신념을 굽히지 않고 잘 지켜 나왔고 무엇보다도 훌륭한 신앙인으로 알고 있다.
특히 옥중에 있을 때, 광주 민중항쟁 이후로 알고 있는데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에 마음자세 등 어려운 상황에서 신앙으로 극복하고 자기의 양심과 신념을 끝까지 지켜나가는 것으로 볼 때 참으로 훌륭한 신앙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앙인이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할 때는 참 바른 방향으로 노력할 것이 아닌가하는, 믿는 마음으로 든든했다.
어떤 구체적인 것으로 표시돼 전달됐는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정치활동을 다시 할 때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에서 초청해서 식사를 했는데 자신의 고생담,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신념, 포부 등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또 일본 납치사건이후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그런 어려움 중에도 신앙으로 영적인 힘을 받았다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를 신념이 강한 신앙인으로 기억하고 있다.
교황님이 구명운동을 직접 했다는 사실은 요즘에 와서 알려진 것으로 당시에는 외교적인 활동을 전혀 공개를 하지 않아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한국내에서도 교회가 어떤 모양으로 노력을 했을테지만 구체적으로 행동을 했는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훌륭한 신앙인이고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정치인으로서 많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신념을 굽히지 않고 잘 지켜 나왔고 무엇보다도 훌륭한 신앙인으로 알고 있다.
특히 옥중에 있을 때, 광주 민중항쟁 이후로 알고 있는데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에 마음자세 등 어려운 상황에서 신앙으로 극복하고 자기의 양심과 신념을 끝까지 지켜나가는 것으로 볼 때 참으로 훌륭한 신앙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앙인이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할 때는 참 바른 방향으로 노력할 것이 아닌가하는, 믿는 마음으로 든든했다.
어떤 구체적인 것으로 표시돼 전달됐는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정치활동을 다시 할 때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에서 초청해서 식사를 했는데 자신의 고생담,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신념, 포부 등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또 일본 납치사건이후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그런 어려움 중에도 신앙으로 영적인 힘을 받았다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를 신념이 강한 신앙인으로 기억하고 있다.
△ DJ의 사면이나 감형을 위해 한국 천주교내에서 여론 형성 과정은 없었는가.
우리가 국내에서 역할을 할 것이라는 생각은 한 적 있지만 공식적으로 거론된 것은 없다. 혹시 주교님 중에 누군가 개인적으로 교황청에 사면이나 감형을 청원했었을 수는 있을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공식적으로는 없었던 것으로 안다.
우리가 국내에서 역할을 할 것이라는 생각은 한 적 있지만 공식적으로 거론된 것은 없다. 혹시 주교님 중에 누군가 개인적으로 교황청에 사면이나 감형을 청원했었을 수는 있을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공식적으로는 없었던 것으로 안다.
△ 1980년 당시 고 김수환 추기경과 윤 대주교님이 전두환을 만나서 사면을 위한 말씀이 있었는지요.
기억이 안 나지만 전두환씨가 이야기를 많이 하는 스타일이어서 아마 그 자리에서 이야기가 나왔을 수 있지만 구체적으로는 생각나는 것은 없다.
기억이 안 나지만 전두환씨가 이야기를 많이 하는 스타일이어서 아마 그 자리에서 이야기가 나왔을 수 있지만 구체적으로는 생각나는 것은 없다.
△ 1987년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발족당시 함석헌 옹과 문익환, 김대중 전 대통령 등과 함께 대주교께서 고문으로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요.
한국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담당 주교로 있었을 당시 상황 같은데 정평위가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함께 고문 자격으로 있었던 것 같다.
취지에 동참해 고문이라는 자리에 올라왔는데 당시 두 전직 대통령이 고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흔쾌히 승낙했다.
당시 정평위에는 이돈명 변호사 등이 있었는데 그런 분들은 직접 참여하고 적극 동참해 나에게 고문으로 위촉된다는 사실을 알려줬을 것이다.
한국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담당 주교로 있었을 당시 상황 같은데 정평위가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함께 고문 자격으로 있었던 것 같다.
취지에 동참해 고문이라는 자리에 올라왔는데 당시 두 전직 대통령이 고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흔쾌히 승낙했다.
당시 정평위에는 이돈명 변호사 등이 있었는데 그런 분들은 직접 참여하고 적극 동참해 나에게 고문으로 위촉된다는 사실을 알려줬을 것이다.
△ DJ와의 개인적인 만남과 일화를 밝힌다면요.
많은 만남은 없었지만 정치활동을 재개한 뒤 그때 정평위에서 초청해 식사를 하면서 상당히 긴 시간동안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던 기억이 난다. 무엇보다 참석자들이 DJ의 이야기를 듣는 입장이었다. 정치 활동을 하면서 광주를 방문하면 교구청을 직접 찾아와 면담을 했던 경우는 여러 번 있었다.
많은 만남은 없었지만 정치활동을 재개한 뒤 그때 정평위에서 초청해 식사를 하면서 상당히 긴 시간동안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던 기억이 난다. 무엇보다 참석자들이 DJ의 이야기를 듣는 입장이었다. 정치 활동을 하면서 광주를 방문하면 교구청을 직접 찾아와 면담을 했던 경우는 여러 번 있었다.
△ 대통령 취임 이후 어떤 만남이 있었는지?
대통령이 된 이후 오히려 만나는 것이 더 조심스러웠다. 일부에서 천주교 신자가 대통령이 됐다고 자꾸 만나면 사람들이 보기에 이상하게 볼 수 있어서다. 대통령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오히려 덜 만났던 것 같다. 야당시절 박해받던 시절에는 마음 편하게 만났다. 우리나라에 참으로 훌륭한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런데 김대통령은 누구보다도 더 박해를 받은 정치인이다. 감옥을 3차례나 다녀오고, 일본에서 납치되고, 5·18 때문에 내란죄목으로 사형까지 언도 받고 참으로 많은 박해를 받았다.
그런데 군사정권, 독재정권이 이후로 김대중씨가 공산주의자인 것처럼 몰고 가는 것을 굉장히 많이 이야기를 했다. 신자인 고위 공무원이 DJ가 빨갱이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듣고 굉장히 놀랬다. 얼마나 세뇌가 되었으면 이런 말이 나오는가. 참 많은 박해를 받은 분이지만 자신의 정치적인 신념을 꿋꿋하게 지켜나간 분이구나.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참으로 훌륭한 지도자를 가졌구나하는 생각을 해봤다.
대통령이 된 이후 오히려 만나는 것이 더 조심스러웠다. 일부에서 천주교 신자가 대통령이 됐다고 자꾸 만나면 사람들이 보기에 이상하게 볼 수 있어서다. 대통령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오히려 덜 만났던 것 같다. 야당시절 박해받던 시절에는 마음 편하게 만났다. 우리나라에 참으로 훌륭한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런데 김대통령은 누구보다도 더 박해를 받은 정치인이다. 감옥을 3차례나 다녀오고, 일본에서 납치되고, 5·18 때문에 내란죄목으로 사형까지 언도 받고 참으로 많은 박해를 받았다.
그런데 군사정권, 독재정권이 이후로 김대중씨가 공산주의자인 것처럼 몰고 가는 것을 굉장히 많이 이야기를 했다. 신자인 고위 공무원이 DJ가 빨갱이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듣고 굉장히 놀랬다. 얼마나 세뇌가 되었으면 이런 말이 나오는가. 참 많은 박해를 받은 분이지만 자신의 정치적인 신념을 꿋꿋하게 지켜나간 분이구나.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참으로 훌륭한 지도자를 가졌구나하는 생각을 해봤다.
△ DJ를 평가한다면
제일 우리가 믿는 바탕이 같은 신앙인으로서 정치하고, 신자로서 믿음에서 오는 신념을 가지고 살아왔다. 이런 것을 바탕으로 믿고 기대하는 마음이 있었다.
박해를 참 많이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신념을 지키신 분이다. 마음으로 여러 가지 잘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어떤 모양으로든 통할 수 있었겠죠.
나를 광주의 대부라고 하는데 그건 민주화 항쟁 후에 교회가 우리 국민들, 특별히 광주시민들이 희생된 이분들이 같은 입장에서 걱정을 함께 나눈다는 차원에서 광주대교구 정평위가 노력을 많이 했다. 그 중에서도 신부님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 신부들이 한 일이 사실 교구장 이름으로 돌아온 것이지, 개인적으로 직접 한 것은 특별히 생각은 안 하는데…. 우리 신부님들, 또 교회가 그런 어려움을, 민족이 큰 시련을 맞고 있을 때 힘껏 기도하고, 여러 가지 특별히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가진 것을 교회로서도 어려움을 나눠가졌다고 생각한다.
제일 우리가 믿는 바탕이 같은 신앙인으로서 정치하고, 신자로서 믿음에서 오는 신념을 가지고 살아왔다. 이런 것을 바탕으로 믿고 기대하는 마음이 있었다.
박해를 참 많이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신념을 지키신 분이다. 마음으로 여러 가지 잘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어떤 모양으로든 통할 수 있었겠죠.
나를 광주의 대부라고 하는데 그건 민주화 항쟁 후에 교회가 우리 국민들, 특별히 광주시민들이 희생된 이분들이 같은 입장에서 걱정을 함께 나눈다는 차원에서 광주대교구 정평위가 노력을 많이 했다. 그 중에서도 신부님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 신부들이 한 일이 사실 교구장 이름으로 돌아온 것이지, 개인적으로 직접 한 것은 특별히 생각은 안 하는데…. 우리 신부님들, 또 교회가 그런 어려움을, 민족이 큰 시련을 맞고 있을 때 힘껏 기도하고, 여러 가지 특별히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가진 것을 교회로서도 어려움을 나눠가졌다고 생각한다.
△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하는데 현 시국에 대한 대주교님의 시각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주교로서도, 또 은퇴한 주교로서도 그렇고 그런 부분에 대한 논평이나 의견을 내놓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 같다. 다만 그동안 여러 정권이 바뀌면서 특히 북한과의 관계에서 인도주의적인 원조를 강조한 것은 정말 잘한 것이다. 지금도 이 정책은 절대로 계승해야한다는 생각이다. 물론 항간에는 이런 것에 대해 뭐 퍼주기를 했느니, 북쪽에 핵 개발을 하는데 결국 도움을 줬느니 말이 많지만 북한에서 핵 개발을 하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도 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남한에서 지원한 인도적인 원조를 받아서 (그것으로)경제적으로 도움이 돼 핵개발을 도와줬다는 지적보다는 북한 주민들이 더욱 고생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런 인도적 도움이 없었다면 그만큼 주민들이 더욱 고생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남북관계는 다른 정치적인 것은 차치하고라도 무조건 인도적인 도움은 있는 힘을 다해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주교로서도, 또 은퇴한 주교로서도 그렇고 그런 부분에 대한 논평이나 의견을 내놓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 같다. 다만 그동안 여러 정권이 바뀌면서 특히 북한과의 관계에서 인도주의적인 원조를 강조한 것은 정말 잘한 것이다. 지금도 이 정책은 절대로 계승해야한다는 생각이다. 물론 항간에는 이런 것에 대해 뭐 퍼주기를 했느니, 북쪽에 핵 개발을 하는데 결국 도움을 줬느니 말이 많지만 북한에서 핵 개발을 하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도 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남한에서 지원한 인도적인 원조를 받아서 (그것으로)경제적으로 도움이 돼 핵개발을 도와줬다는 지적보다는 북한 주민들이 더욱 고생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런 인도적 도움이 없었다면 그만큼 주민들이 더욱 고생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남북관계는 다른 정치적인 것은 차치하고라도 무조건 인도적인 도움은 있는 힘을 다해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 강경 일변도보다는 햇볕정책을 추진해야한다는 말인가?
꼭 무슨 정부, 무슨 정권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전보다 인도적인 원조의 길을 넓혀 가는, 원칙적으로 인도주의적인 원조는 최선을 다해야한다는 생각이다.
꼭 무슨 정부, 무슨 정권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전보다 인도적인 원조의 길을 넓혀 가는, 원칙적으로 인도주의적인 원조는 최선을 다해야한다는 생각이다.
© 광남일보 2009-08-18 고선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