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소식
교구천주교광주대교구, 19일 故 정형달 신부 장례미사 봉헌
- 작성자 : 관리자
- 등록일 : 2021-01-21
- 조회수 : 572
(광주가톨릭평화방송) 김선균 기자⸳나지수 기자 = 천주교광주대교구는 오늘(19일)오전 10시 염주동성당에서 교구장인 김희중 대주교가 주례한 가운데 지난 16일 지병으로 선종한 정형달 바오로 신부의 장례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이날 장례미사는 코로나19 방역 수칙에 따라 교구 사제와 유가족 등 최소 인원만 참례한 가운데 봉헌됐으며, 광주가톨릭평화방송 공식 유튜브 채널을 통해 생중계됐습니다.
장례미사를 주례한 김 대주교는 강론에서 “고인과 함께했던 시간이 아직도 생생한데 유명을 달리해 말없이 누워 계시니 황망하다”며 “고별식이 끝나면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라는 하느님 말씀에 따라 생전의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니 더욱 안타깝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이제 죽음이라는 문턱을 넘긴 고인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현세적 한계를 뛰어넘어 앞으로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라 믿는다”며 “육체라는 감옥에서 해방돼 따뜻한 하느님 품에 안기신 고인은 이제 천상의 행복을 누리며 하늘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실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살면서 정직하게 산 사람들이 불의하게 세상을 떠나기도 하고, 지탄받는 사람들이 행복하고 편하게 살다 죽는 소위 모순적인 종말을 체험하기도 한다”며 “이런 죽음을 목도할 때마다 세상은 살만한 가치가 없다는 염세주의에 빠지기 쉽지만 우리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다시 돌아가는 것이지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고 말했습니다.
김 대주교는 “정 신부님은 평생을 하느님과 교회에 봉헌하는 삶을 살았다”며 “고인은 평소 교회 관련 책을 많이 읽고 공부하며 교회 가르침에 충실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정 신부는 광주5.18민주화운동 이전에는 정의구현사제단 일원으로 우리나라 민주주의와 인권, 정의, 평화를 위해 투신하셨고, 1980년 6월에는 광주교구 사제단을 이끌어 '광주사태진상'이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작성하셨다”고 밝혔습니다.
또, “5.18의 원인이 계엄군의 무자비한 탄압이라는 진실을 알리는데 앞장섰다”며 “정의평화위원장으로 활동하던 당시 5.18 관련 천주교회의 활동을 책으로 엮은 자료집을 발간해 광주의 진상을 교회 안팎으로 알려 채포돼 구금을 당하기도 했다”고 회고했습니다.
김 대주교는 “이제 고인께서 우리 교구와 사제단에 물려준 가르침과 활동을 큰 유산으로 귀하게 여기며 남아있는 우리가 받들어야 할 것"이라며 “정 신부가 평소 챙겨주시던 어려움 중에 있는 신부들을 함께 감당하고, 근검절약하며 보여주신 가난한 교회, 가난한 사제상을 이어받아 가꿔 나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이날 장례미사 추모식에서는 정 신부와 동기인 제주교구 김창훈 신부가 추모사를 했습니다.
김 신부는 “사제로서 50여년을 하느님을 위해 봉사하다보니 동창들도 한 명씩 하느님께서 데려가고 있다”며 “다음에는 또 누가 부르심을 받을지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모두가 다 정 신부가 간 길을 따라 하느님께서 불러 주실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정 신부는 동창들 중에서도 유별하게 열정적인 정의감을 가진 사람이었다”며 “그리스도의 복음 정신을 따라 모범적인 삶을 살아 동창들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랑하는 동창인 정 신부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다가 어느날 함께 모여 하느님을 영원히 찬미하는 날이 오기를 기도한다”고 말했습니다.
장례미사를 마친 정 신부의 유해는 담양천주교공원묘원에서 옥현진 총대리주교가 주례하는 하관예절을 끝으로 영원한 안식에 들었습니다.
한편 향년 78세로 선종한 故 정형달 바오로 신부는 1943년 9월 전남 나주에서 태어나 1969년 12월 16일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이후 장성본당과 남동본당 보좌신부를 거쳐 해남본당과 서교동본당, 신동본당, 농성동본당 주임신부를 지냈습니다.
또, 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을 비롯해 용당동본당, 임곡본당, 옥암동본당 주임신부를 지낸 뒤 운암동본당 주임신부를 끝으로 2011년 7월 27일 퇴임식을 갖고 42년간의 사목활동을 마감했습니다.
故 정형달 신부는 계엄군 학살의 공포가 채 가시기 전인 1980년 6월 광주대교구 사제단이 광주항쟁 이후 최초로 발표한 ‘광주사태의 진상’이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직접 작성한 주인공으로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데 앞장선 장본인입니다.
당시 정 신부가 작성한 성명에는 “비상계엄이라는 허울 속에 정부 당국의 거짓된 발표와 통제된 언론의 편향보도로 인하여 철저히 왜곡되어 있다”고 비판하며 “사태의 원인이 계엄군의 무자비한 탄압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이 성명서는 당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서울대교구 명동성당 주교관에서 모임을 갖고 광주사태의 진실을 알리는 것이 급한 상황에서 공신력 있는 단체의 증언이 시급하다는 결론에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 교구 신부들이 성명을 만장일치로 채택한 뒤 대량으로 복사돼 한국 천주교회 모든 교구에 전달되면서 광주의 참상을 알리는 소중한 자료가 됐습니다.
당시 이 같은 활동을 이유로 보안대에 연행돼 보름정도 구금됐던 정 신부는 5.18광주진상과 관련된 유인물을 작성하게 된 배경과 배부과정 등에 대해 심한 추궁을 받는 등 고초를 겪었습니다.
이 같은 신군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정 신부는 5.18관련 구속자들의 석방을 위해 가족들과 함께 했고, 특히 광주대교구 정평위원장으로 활동하던 1985년 5월에는 5.18과 관련된 천주교회의 활동을 책으로 엮은 ‘광주의거자료집’을 발간하며 5.18의 진상을 교회 안팎으로 알리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습니다.
정 신부는 생전 5.18과 관련한 구술증언(5.18의 기억과 역사 5-천주교편<5.18기념재단刊, 2013>)에서 “우리나라에서는 5.18의 숭고한 정신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라는 사실이 안타깝다”며 왜곡과 폄훼에 대해 안타까움을 드러낸 뒤, “그만큼 신군부의 5.18당시 탄압과 음모의 후유증이 심했고 억압이 짙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광주 5.18정신이 우리 민족의 고귀한 정신적 자산으로 사회에 통용되고, 또 후손들이 지향해야 할 삶의 방향으로 설정하는 방법을 모색하자”고 당부했습니다.
< 저작권자(c)광주가톨릭평화방송,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이날 장례미사는 코로나19 방역 수칙에 따라 교구 사제와 유가족 등 최소 인원만 참례한 가운데 봉헌됐으며, 광주가톨릭평화방송 공식 유튜브 채널을 통해 생중계됐습니다.
장례미사를 주례한 김 대주교는 강론에서 “고인과 함께했던 시간이 아직도 생생한데 유명을 달리해 말없이 누워 계시니 황망하다”며 “고별식이 끝나면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라는 하느님 말씀에 따라 생전의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니 더욱 안타깝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이제 죽음이라는 문턱을 넘긴 고인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현세적 한계를 뛰어넘어 앞으로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라 믿는다”며 “육체라는 감옥에서 해방돼 따뜻한 하느님 품에 안기신 고인은 이제 천상의 행복을 누리며 하늘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실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살면서 정직하게 산 사람들이 불의하게 세상을 떠나기도 하고, 지탄받는 사람들이 행복하고 편하게 살다 죽는 소위 모순적인 종말을 체험하기도 한다”며 “이런 죽음을 목도할 때마다 세상은 살만한 가치가 없다는 염세주의에 빠지기 쉽지만 우리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다시 돌아가는 것이지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고 말했습니다.
김 대주교는 “정 신부님은 평생을 하느님과 교회에 봉헌하는 삶을 살았다”며 “고인은 평소 교회 관련 책을 많이 읽고 공부하며 교회 가르침에 충실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정 신부는 광주5.18민주화운동 이전에는 정의구현사제단 일원으로 우리나라 민주주의와 인권, 정의, 평화를 위해 투신하셨고, 1980년 6월에는 광주교구 사제단을 이끌어 '광주사태진상'이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작성하셨다”고 밝혔습니다.
또, “5.18의 원인이 계엄군의 무자비한 탄압이라는 진실을 알리는데 앞장섰다”며 “정의평화위원장으로 활동하던 당시 5.18 관련 천주교회의 활동을 책으로 엮은 자료집을 발간해 광주의 진상을 교회 안팎으로 알려 채포돼 구금을 당하기도 했다”고 회고했습니다.
김 대주교는 “이제 고인께서 우리 교구와 사제단에 물려준 가르침과 활동을 큰 유산으로 귀하게 여기며 남아있는 우리가 받들어야 할 것"이라며 “정 신부가 평소 챙겨주시던 어려움 중에 있는 신부들을 함께 감당하고, 근검절약하며 보여주신 가난한 교회, 가난한 사제상을 이어받아 가꿔 나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이날 장례미사 추모식에서는 정 신부와 동기인 제주교구 김창훈 신부가 추모사를 했습니다.
김 신부는 “사제로서 50여년을 하느님을 위해 봉사하다보니 동창들도 한 명씩 하느님께서 데려가고 있다”며 “다음에는 또 누가 부르심을 받을지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모두가 다 정 신부가 간 길을 따라 하느님께서 불러 주실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정 신부는 동창들 중에서도 유별하게 열정적인 정의감을 가진 사람이었다”며 “그리스도의 복음 정신을 따라 모범적인 삶을 살아 동창들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랑하는 동창인 정 신부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다가 어느날 함께 모여 하느님을 영원히 찬미하는 날이 오기를 기도한다”고 말했습니다.
장례미사를 마친 정 신부의 유해는 담양천주교공원묘원에서 옥현진 총대리주교가 주례하는 하관예절을 끝으로 영원한 안식에 들었습니다.
한편 향년 78세로 선종한 故 정형달 바오로 신부는 1943년 9월 전남 나주에서 태어나 1969년 12월 16일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이후 장성본당과 남동본당 보좌신부를 거쳐 해남본당과 서교동본당, 신동본당, 농성동본당 주임신부를 지냈습니다.
또, 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을 비롯해 용당동본당, 임곡본당, 옥암동본당 주임신부를 지낸 뒤 운암동본당 주임신부를 끝으로 2011년 7월 27일 퇴임식을 갖고 42년간의 사목활동을 마감했습니다.
故 정형달 신부는 계엄군 학살의 공포가 채 가시기 전인 1980년 6월 광주대교구 사제단이 광주항쟁 이후 최초로 발표한 ‘광주사태의 진상’이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직접 작성한 주인공으로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데 앞장선 장본인입니다.
당시 정 신부가 작성한 성명에는 “비상계엄이라는 허울 속에 정부 당국의 거짓된 발표와 통제된 언론의 편향보도로 인하여 철저히 왜곡되어 있다”고 비판하며 “사태의 원인이 계엄군의 무자비한 탄압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이 성명서는 당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서울대교구 명동성당 주교관에서 모임을 갖고 광주사태의 진실을 알리는 것이 급한 상황에서 공신력 있는 단체의 증언이 시급하다는 결론에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 교구 신부들이 성명을 만장일치로 채택한 뒤 대량으로 복사돼 한국 천주교회 모든 교구에 전달되면서 광주의 참상을 알리는 소중한 자료가 됐습니다.
당시 이 같은 활동을 이유로 보안대에 연행돼 보름정도 구금됐던 정 신부는 5.18광주진상과 관련된 유인물을 작성하게 된 배경과 배부과정 등에 대해 심한 추궁을 받는 등 고초를 겪었습니다.
이 같은 신군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정 신부는 5.18관련 구속자들의 석방을 위해 가족들과 함께 했고, 특히 광주대교구 정평위원장으로 활동하던 1985년 5월에는 5.18과 관련된 천주교회의 활동을 책으로 엮은 ‘광주의거자료집’을 발간하며 5.18의 진상을 교회 안팎으로 알리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습니다.
정 신부는 생전 5.18과 관련한 구술증언(5.18의 기억과 역사 5-천주교편<5.18기념재단刊, 2013>)에서 “우리나라에서는 5.18의 숭고한 정신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라는 사실이 안타깝다”며 왜곡과 폄훼에 대해 안타까움을 드러낸 뒤, “그만큼 신군부의 5.18당시 탄압과 음모의 후유증이 심했고 억압이 짙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광주 5.18정신이 우리 민족의 고귀한 정신적 자산으로 사회에 통용되고, 또 후손들이 지향해야 할 삶의 방향으로 설정하는 방법을 모색하자”고 당부했습니다.
< 저작권자(c)광주가톨릭평화방송, 무단전재-재배포금지>
공유하기 화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