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소식
교구20일 사제 수품 70주년 맞은 윤공희 대주교, ''하느님의 은혜로 건강하게 지내 늘 감사''
- 작성자 : 관리자
- 등록일 : 2020-03-20
- 조회수 : 1014
(광주가톨릭평화방송) 김선균 기자 = 제7대 천주교광주대교구장을 지낸 윤공희(빅토리노)대주교가 20일 '사제 수품 70주년'을 맞았습니다.
한국 천주교회 역사에서 사제 수품 70주년을 맞았던 사제는 부산교구장을 지낸 故최재선(요한) 주교로, 1938년 6월 11일 사제품을 받은 뒤 정확히 70년에서 8일이 부족한 2008년 6월 3일 선종했습니다.
윤공희 대주교는 1950년 3월 서울 성신대학을 졸업한 뒤 같은해 3월 20일 사제품을 받았으며, 20일로 꼬박 70년 동안 사제의 길을 걸어온 그야말로 한국 천주교회의 살아있는 '역사'입니다.
윤공희 대주교는 일제치하의 혹독한 찬 바람이 불던 지난 1924년 11월 8일 평안남도 진남포시 용정리에서 아버지 윤상 베드로와 어머니 최상숙 빅토리아 사이에 4남 1녀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 윤 대주교의 집은 성당근처에 있었고 특히 본당 일을 열심히 도와주던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윤 대주교를 훗날 신부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윤 대주교는 1946년 3월 함경남도 덕원신학교에서 철학과와 신학과를 마치고 부제가 된 뒤, 당시 정치적, 이념적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에게 사제품을 줄 주교가 공산정권에 의해 모두 납치되자 남한에 내려가 사제품을 받으라는 주변의 권유에 따라 1950년 자신의 신학교 동기이자 초대 원주교구장을 지냈던 故지학순 주교와 함께 3.8선을 넘었습니다.
1950년 3월 20일 가톨릭대학교의 전신인 서울 성신대학에서 공부를 마치고 故노기남 대주교로부터 꿈에 그리던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사제가 된 윤 대주교는 1950년 4월부터 서울 명동성당에서 보좌 신부로 사목하다 1950년 6․25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내려가 UN포로수용소에서 종군신부로 활동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1954년에는 부산가톨릭도서관 부관장을 거쳐 서울 성신중고등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습니다.
공부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했던 윤 대주교는 1956년 9월 로마 유학길에 올라 울바노대학에서 신학석사를, 1960년 그레고리안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총무를 맡아 실무를 총괄하다 1963년 10월 7일 교황청으로부터 수원교구장에 임명된 데 이어, 같은 해 10월 20일 주교품을 받았습니다.
윤 대주교의 당시 나이는 만 39살이었습니다.
주교품을 받은지 올해로 57주년을 맞는 윤 대주교는 생존한 한국 천주교 주교 가운데 최고 원로로 교회는 물론 우리 사회의 큰 어른입니다.
1963년 10월 7일 수원교구장에 착좌한 윤 대주교는 1967년 3월 24일 교황청에서 서울대교구장 서리를 겸하도록 사명을 받았습니다.
윤 대주교는 故김수환 추기경이 서울대교구장으로 착좌하기 전인 1968년 4월까지 1년 동안 서울대교구장 서리를 맡아 교구를 이끌었습니다.
윤 대주교는 수원교구장으로 사목하던 1967년 4월부터 1970년 10월까지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임시의장을 거쳐, 1975년 3월까지 주교회의 부의장을 지냈습니다.
천주교광주대교구와 윤공희 대주교와의 인연은 지난 1973년 10월 25일 대주교 승품과 함께 광주대교구장에 임명되면서부터 시작됐습니다.
2000년 11월 30일 광주대교구장에서 은퇴할 때까지 27년 동안 광주대교구장으로 사목하면서 밖으로는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과 사회주교위원회 위원장, 성직주교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한국 천주교 발전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교구장에 착좌할 당시 40여명에 불과하던 광주대교구 사제들은 퇴임 무렵 200여명으로 늘었고, 8만여명이던 신자들은 30만명으로 증가해 지역 복음화에 큰 획을 그었습니다.
윤 대주교는 1980년 5․18민중항쟁을 겪으면서 광주대교구장으로서, 광주의 어른으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당시 참상은 자신의 삶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다고 훗날 회고했습니다.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한국 방문을 이끌어 냈고, 특히 첫 지역 방문지로 교황을 광주에 모신 일은 자신을 가장 흥분시켰던 일로 꼽았습니다.
윤공희 대주교는 퇴임한 뒤에도 신자들과 거리를 두지 않고 격의 없는 만남을 갖고, 자신의 사목 표어인 ‘그리스도의 평화’를 위해 기도를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2020년 3월 20일.
천주교광주대교구는 물론, 한국 천주교회에도 사제 수품 70주년을 맞은 이 시대의 큰 어른이 우리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매우 뜻깊고 행복한 날입니다.
윤공희 대주교는 사제수품 70주년 기념일인 20일 '소박하게나마 미사를 봉헌하자'는 후배 사제들의 간곡한 요청에 대해 "자신이 머무는 주교관에서 기도와 묵상으로 조용히 보내겠다"며 정중히 사양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윤 대주교는 광주가톨릭평화방송과 가진 '특별인터뷰'에서 70년 동안 사제로 살아온 소회를 묻는 질문에 "하느님의 은혜로 건강하게 지내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며 "사제로서 삶이 보람된 삶이라 생각했고, 일편단심 사제로서 하느님을 섬기고 영적으로 봉사하는 삶이 보람되겠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다"고 회고했습니다.
한편 광주가톨릭평화방송은 올해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윤공희 대주교의 '특별인터뷰'를 제작하고 있습니다.
총 2부작으로 제작하고 있는 이번 '특별인터뷰'는 윤공희 대주교의 삶과 신앙, 이산가족의 애환, 5.18당시 사제로서, 한 인간으로서의 고뇌를 담담하게 담아내 오는 5월 18일 평화방송TV와 라디오를 통해 전국에 방송할 예정입니다.
< 저작권자(c) 광주가톨릭평화방송, 무단전재-재배포금지>
한국 천주교회 역사에서 사제 수품 70주년을 맞았던 사제는 부산교구장을 지낸 故최재선(요한) 주교로, 1938년 6월 11일 사제품을 받은 뒤 정확히 70년에서 8일이 부족한 2008년 6월 3일 선종했습니다.
윤공희 대주교는 1950년 3월 서울 성신대학을 졸업한 뒤 같은해 3월 20일 사제품을 받았으며, 20일로 꼬박 70년 동안 사제의 길을 걸어온 그야말로 한국 천주교회의 살아있는 '역사'입니다.
윤공희 대주교는 일제치하의 혹독한 찬 바람이 불던 지난 1924년 11월 8일 평안남도 진남포시 용정리에서 아버지 윤상 베드로와 어머니 최상숙 빅토리아 사이에 4남 1녀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 윤 대주교의 집은 성당근처에 있었고 특히 본당 일을 열심히 도와주던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윤 대주교를 훗날 신부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윤 대주교는 1946년 3월 함경남도 덕원신학교에서 철학과와 신학과를 마치고 부제가 된 뒤, 당시 정치적, 이념적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에게 사제품을 줄 주교가 공산정권에 의해 모두 납치되자 남한에 내려가 사제품을 받으라는 주변의 권유에 따라 1950년 자신의 신학교 동기이자 초대 원주교구장을 지냈던 故지학순 주교와 함께 3.8선을 넘었습니다.
1950년 3월 20일 가톨릭대학교의 전신인 서울 성신대학에서 공부를 마치고 故노기남 대주교로부터 꿈에 그리던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사제가 된 윤 대주교는 1950년 4월부터 서울 명동성당에서 보좌 신부로 사목하다 1950년 6․25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내려가 UN포로수용소에서 종군신부로 활동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1954년에는 부산가톨릭도서관 부관장을 거쳐 서울 성신중고등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습니다.
공부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했던 윤 대주교는 1956년 9월 로마 유학길에 올라 울바노대학에서 신학석사를, 1960년 그레고리안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총무를 맡아 실무를 총괄하다 1963년 10월 7일 교황청으로부터 수원교구장에 임명된 데 이어, 같은 해 10월 20일 주교품을 받았습니다.
윤 대주교의 당시 나이는 만 39살이었습니다.
주교품을 받은지 올해로 57주년을 맞는 윤 대주교는 생존한 한국 천주교 주교 가운데 최고 원로로 교회는 물론 우리 사회의 큰 어른입니다.
1963년 10월 7일 수원교구장에 착좌한 윤 대주교는 1967년 3월 24일 교황청에서 서울대교구장 서리를 겸하도록 사명을 받았습니다.
윤 대주교는 故김수환 추기경이 서울대교구장으로 착좌하기 전인 1968년 4월까지 1년 동안 서울대교구장 서리를 맡아 교구를 이끌었습니다.
윤 대주교는 수원교구장으로 사목하던 1967년 4월부터 1970년 10월까지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임시의장을 거쳐, 1975년 3월까지 주교회의 부의장을 지냈습니다.
천주교광주대교구와 윤공희 대주교와의 인연은 지난 1973년 10월 25일 대주교 승품과 함께 광주대교구장에 임명되면서부터 시작됐습니다.
2000년 11월 30일 광주대교구장에서 은퇴할 때까지 27년 동안 광주대교구장으로 사목하면서 밖으로는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과 사회주교위원회 위원장, 성직주교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한국 천주교 발전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교구장에 착좌할 당시 40여명에 불과하던 광주대교구 사제들은 퇴임 무렵 200여명으로 늘었고, 8만여명이던 신자들은 30만명으로 증가해 지역 복음화에 큰 획을 그었습니다.
윤 대주교는 1980년 5․18민중항쟁을 겪으면서 광주대교구장으로서, 광주의 어른으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당시 참상은 자신의 삶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다고 훗날 회고했습니다.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한국 방문을 이끌어 냈고, 특히 첫 지역 방문지로 교황을 광주에 모신 일은 자신을 가장 흥분시켰던 일로 꼽았습니다.
윤공희 대주교는 퇴임한 뒤에도 신자들과 거리를 두지 않고 격의 없는 만남을 갖고, 자신의 사목 표어인 ‘그리스도의 평화’를 위해 기도를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2020년 3월 20일.
천주교광주대교구는 물론, 한국 천주교회에도 사제 수품 70주년을 맞은 이 시대의 큰 어른이 우리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매우 뜻깊고 행복한 날입니다.
윤공희 대주교는 사제수품 70주년 기념일인 20일 '소박하게나마 미사를 봉헌하자'는 후배 사제들의 간곡한 요청에 대해 "자신이 머무는 주교관에서 기도와 묵상으로 조용히 보내겠다"며 정중히 사양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윤 대주교는 광주가톨릭평화방송과 가진 '특별인터뷰'에서 70년 동안 사제로 살아온 소회를 묻는 질문에 "하느님의 은혜로 건강하게 지내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며 "사제로서 삶이 보람된 삶이라 생각했고, 일편단심 사제로서 하느님을 섬기고 영적으로 봉사하는 삶이 보람되겠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다"고 회고했습니다.
한편 광주가톨릭평화방송은 올해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윤공희 대주교의 '특별인터뷰'를 제작하고 있습니다.
총 2부작으로 제작하고 있는 이번 '특별인터뷰'는 윤공희 대주교의 삶과 신앙, 이산가족의 애환, 5.18당시 사제로서, 한 인간으로서의 고뇌를 담담하게 담아내 오는 5월 18일 평화방송TV와 라디오를 통해 전국에 방송할 예정입니다.
< 저작권자(c) 광주가톨릭평화방송, 무단전재-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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