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공희(88) 빅토리노 대주교는 1924년 11월8일 평남 진남포에서 태어나 평양교구에서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어린 시절 윤 대주교의 가족이 성당에 다니고 있었기에 그도 자연스럽게 천주교 사제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배경이 됐다. 그렇게 1946년 3월 함경남도 덕원신학교에서 신학생으로 입학해 생활하던 중 당시 정치적 이념적 갈등으로 자신에게 사제품을 줄 주교가 공산정권에 의해 모두 납치되자 신학생 동기들과 월남해 한국에서 자리를 잡게 됐다. 1950년 4월 서울 성신대학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서울대교구 명동 신부생활을 시작하다 6·25전쟁이 터지자 부산 UN 포로수용소에서 종군신부로 복무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1956년 로마 유학을 떠나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에 돌아온 후 1963년 주교로 수품됐다.
광주와의 인연은 1973년 대주교로 승품 된 후 광주대교구장으로 임명되면서 시작됐다. 광주 대교구장으로 활동하면서 그는 1976년 함평 고구마사건, 1980년 광주민중항쟁 등에서 사회 정의를 앞장서는 데 버팀목이 되곤 했다. 함평 고구마사건은 1976년 함평군 농민들이 농협과 정부 당국을 상대로 전개한 고구마 피해보상 투쟁이다. 당시 윤 대주교는 농민들을 찾아 위로기도를 올렸으며 광주대교구산하 60여명의 신부도 이에 동참해 농민들을 지원했다.
5·18 민중항쟁은 윤 대주교가 광주대교구 생활을 했을 때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당시 군부에 의해 폭도로 몰린 광주시민들은 믿고 의지할 곳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가운데 광주대교구 사제들은 진실 규명을 촉구하며 자료와 유인물을 돌리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조철현 신부, 김성용 신부 등 8명은 내란선동이라는 죄목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5·18 민중항쟁 후에도 이들의 노력은 계속됐다. 윤 대주교는 사제들과 함께 진실 규명을 위해 노력했으며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돼 대법원에서 사형 판결을 받은 사람들의 사면을 위해 발로 뛰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윤 대주교는 광주의 어른으로 추앙받았다.
어렵고 소외된 사람을 위해 삶은 살아온 윤 대주교는 지난 2000년 11월30일 광주대교구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호행 기자 gmd@gjdream.com
교회소식
교구[광주드림] 되돌아본 윤공희 대주교 서품 50년
- 작성자 : 관리자
- 등록일 : 2013-10-24
- 조회수 : 507
80년 5월 등 광주의 아픔과 ‘늘 함께’
▲ 주교성성 50주년을 맞은 윤공희 대주교가 22일 임동성당에서 미사를 진행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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